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2021 tvN, 박보영, 서인국 주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사이. 하루 종일 과제만 하고 있자니 너무 심심해서 드라마 정주행이나 해 보았다.

100일이 남은 사람의 하나의 소원

자신의 죽음보다 타인의 불행을 걱정하는 동경

조직검사… 못해요. 연차 며칠 써가지고 일주일동안 휴가 못 내요. - 동경(박보영), Ep.1

탁동경(박보영) 영정사진 찍을 때
탁동경(박보영) / 출처 : tvN 현장포토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동경(박보영)은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고, 3개월이라는 시한부를 선고 받는다. 그 사실을 들은 그녀는 의사의 권유에도 조직검사를 정중히 거절하고, 죽음보다도 3개월 할부의 병원비가 더 걱정이다. 그 날 출장에서 늦게 들어왔다고 혼내는 대표 앞에서도, 회사 동료와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시한부를 선고받았음을 알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이어가는 동경에게 마음이 쓰이는 사람은 자신의 하나뿐인 가족, 동생 뿐이다.

멸망시키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주려고 온 멸망

세상 다 망해라! 다 멸망해버려! 멸망시켜줘! - 동경(박보영), Ep.1

멸망(서인국) 첫번째 사고현장 바라볼 때
멸망(서인국) / 출처 : tvN 현장포토

자신의 옥탑방에서 혼자 취한 동경은 난간에 대고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게 된 멸망(서인국)은 흥미를 가졌고, 그 소원을 대신 이루어주고자 동경의 현관으로 찾아왔다. 신적인 능력을 가진 멸망을 마주하게 된 동경은 당황했고,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소원이 진심이 아니었음을 설명하고 돌려보내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이렇게 동경과 멸망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 되었다.

판타지 드라마다운 전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소재를 다루는 일반적인 드라마와는 달리, 이 드라마에는 판타지 요소가 가미되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드라마의 전체적인 흐름에 있어, 시청자가 우연과 필연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야기 밑에 깔린 독특한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알다가도 모르는 이러한 세계관은 드라마에선 쉽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때로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대사로, 때로는 주인공의 심오한 독백으로 모든 회차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여주와 남주 사이의 기구한 운명

별이 지는 순간에, 그 소원을 비는 건 너밖에 없어서. - 멸망(서인국), Ep.2

어떻게 동경과 멸망이 엮이게 된 건지는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드라마 초반 1, 2화는 이 둘의 운명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 인간계의 멸망을 주관하는 멸망(남주).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 그는 자신의 생일에 한 명의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 때마침 그 날에 세상 다 망해버리라는 소원을 빌게 된 동경(여주).
  • 그 소원을 듣고 이참에 세상을 멸망시켜버리고 싶은 그는 동경을 찾아왔다.
  • 멸망은 죽기 전 까지 100일간 동경이 아프지 않는 대신 소원으로 멸망을 빌 것을 계약한다.
  • 이 계약을 파기할 때는, 동경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동경 대신 죽는다는 조건이 있다.

그리하여, 동경은 자신과 이 세상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선택 위에 서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면 세상이 멸망하고, 세상을 지키려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요. 이런 설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해피엔딩일 수 있을까요? - 동경(박보영), Ep.10

이러한 가혹한 운명 속에서 동경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멸망을 가장 사랑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런 당돌한 동경의 선전포고에 멸망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고, 이 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없에버리고픈 멸망(남주)을 사랑하려는 동경(여주). 묘수같은 선택이 이 드라마의 극적인 전개를 이끌게 된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을 지키고자 기꺼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동경의 마음가짐 또한 본격적으로 특별한 세계관 위에서 펼쳐지는 내용들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꽃, 나비 그리고 정원사

소녀신(정지소) 병상에서
소녀신(정지소) / 출처 : tvN 현장포토

극 중 신비로운 존재로 멸망 이외에도 그를 존재하게 한 소녀신(정지소)이 나온다. 소녀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사랑하지만 정작 본인은 인간계에서 연약한 소녀의 몸으로 태어나 죽기를 반복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멸망은 인간을 사악한 존재로 규정하고 증오하면서, 영원불멸하게 지구를 휩쓸고 다닌다.

드라마에서는 소녀신과 멸망, 인간의 관계에 대해 “정원”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정원사인 신은 꽃이라는 인간을 창조하고 정원을 꾸민다. 그 정원에는 신의 주문으로 행동하는 나비, 바로 멸망이 활동하면서 신과 함께 정원을 가꾸게 된다.

소녀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이므로, 멀쩡하게 흘러가는 드라마에서 자신의 능력에 걸맞게 급격한 양상의 전환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동경과 멸망 사이에서 가끔씩 등장하는 소녀신은 그들 모두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결국에는 여주와 남주가 더욱 각별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빈번한 상황 전환

멸망과 소녀신의 신적인 능력은 그동안 진행되왔던 일련의 개연성과 상관없이, 단지 세계관의 설정으로 인해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기도 한다. 동경과 멸망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계가 펼쳐지기도 했다.

  • 현재의 멸망이 바라보는 과거의 동경
  • 동경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멸망
  • 서로의 기억이 지워진 동경과 멸망
  • 세상의 멸망 이후를 보는 동경과 멸망

판타지라는 특성에 맞게 일상생활 중간중간 위와 같은 기이한 광경들이 제시되곤 한다. 이러한 연출은 단지 신적인 존재의 능력을 부각시키는 목적이 아니다. 주인공들이 이 세계관을 경험한 이후 왜 특정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한다. 시청자들에게 배경지식 및 상황설명을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웹소설 느낌이 물씬 나는 순간들

드라마 포스터
드라마 포스터 / 출처 : tvN 대표이미지

드라마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웹소설 감성 또한 이 드라마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꼽을 수 있다.

웹소설 편집자의 일상

동경은 웹소설 편집팀의 직원이다. 그녀가 처음 시한부 진단을 받았을 때도 웹소설 작가인 의사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 병원에 찾아간 것이었다. 이 드라마에는 여러 웹소설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직장 때려치고 전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 전업주부로서 취미삼아 글을 쓰는 사람, 그리고 고등학생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아이돌 데뷔하고 비밀리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다양한 상황에 놓인 작가들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평범한 문학작품이 아닌 “웹소설”이라는 특별한 장르를 주제로 삼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오글거리는 멘트

사라지는것이 두렵지는 않으나, 너를 더는 보지 못한다는 것은 두려웠다. - 멸망(서인국) Ep.9

유난히 주인공들의 독백이 많았던 드라마였다. 그만큼 주인공들의 내면심리 묘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했었고, 세게관의 중요한 특징을 설명할 때도 자주 사용되었다. 은유적 표현을 덧붙인 의미심장한 대사로 드라마의 흐름을 주도할 때는 시청자로 하여금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일상적인 대화로만 전개하는 것과는 달리, 주인공들의 감정연기와 서사가 결합된 구조는 소설 그 이상의 몰입감을 선사하기도 했다.

총평: 신선한 장르의 결합

판타지 웹소설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기존 로맨스 코미디의 장르에 직, 간접적으로 결합시킨 작품이다. 비록 나는 웹소설을 접해보진 않았지만 웹소설 플랫폼이 최근 엄청난 수익을 거두는 것을 보면 최신 트렌드에 맞게 따라가려는 드라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존 문학작품과는 달리 개성이 강한 웹소설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정도의 작품성이라면 충분히 잘 결합했다고 볼 수 있다.

정주행 이후에 후기를 작성하고자 유튜브 클립영상 몇 개를 찾아보았는데, “이런 대사가 이런 뜻이었어?”라고 놀랄 정도로 풍부한 서사가 담겨있는 드라마라는 것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웹소설보다 드라마를 많이 본 한명의 시청자 입장에서 볼 때, 판타지 세계관을 설명할 때 중요한 내용을 은유적으로 함축시킨 주인공의 대사를 듣고 있자면 자칫 “뭔 개소리야?”라고 고개를 갸우뚱 했던 부분이 꽤 있었다. 드라마의 분위기에 몽환적인 요소를 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의 세계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