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냥 드라마 보다가

내가 재미있게 본 드라마 중 하나로 정소민, 이민기 주연의 ‘이번 생은 처음이라’ (2018, tvN)라는 드라마가 있다. 여주인공인 지호(정소민)가 고등학생 때 부터 항상 갖고 다니는 포스터가 있는데, 바로 영화 ‘졸업’(1967)의 포스터이다. 저 영화는 극 중 대사로 딱 한번만 언급이 될 뿐, 내용 전개에 있어 엄청난 영향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항상 정소민의 방에 붙어있기 때문에 드라마에서는 저 포스터가 꽤나 자주 노출이 된다. 저 드라마에 나온 소설도 읽었겠다, 이제 저 ‘졸업’이라는 영화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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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자주 나왔는지 저 포스터는 드라마 본지 2년이 지났는데도 기억난다.  /  출처: Tving

영화 졸업의 메시지

젊은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벤자민으로, 아주 번듯한 삶을 살고 있는 젊은이이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학업에 관한 영예로운 상도 수상한 그는 주변 어른들로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미래가 막막하기만 하다.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오는 중에도, 그의 졸업 파티가 한창인 가운데 홀로 방 안에서 멍때리고 있는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다. 그가 사람을 상대할 때도 미숙하기만 하다. 남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에 기계적으로 대답만 하고, 별것도 아닌 대화나 상황 속에서 혼자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거나, 쉽게 진지하게 대하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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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초점 풀린 눈. 꽤나 긴 러닝타임동안 저 표정을 보여준다.  /  출처: Broken Panda

벤자민은 전형적인 젊은이를 묘사하고 있다. 전형적인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는 어른들이 볼 때 좋은 시절을 보내는 중이라고 대견해하지만, 그러한 시선 속에서 그는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제 막 졸업을 한 그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낯설고 어렵기만 하다.

기성세대와의 갈등

벤자민은 부모님의 재촉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수영장이 있는 가정집에 살고 있고, 지인들을 초대해 자주 파티를 열 정도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전혀 서두를 것 없지만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앞으로 뭘 할거니?’, ‘대학원은 갈거니?’, ‘결혼은 언제 할거니?’ 라고 하면서 자꾸만 그를 재촉한다. 그런 말들은 다 벤자민이 잘 되라고 하는 조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선 아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끼는 상황 속에서 그런 말들은 그를 자꾸만 어지럽게 만들 뿐이다.

그의 사랑 또한 어른들에게 방해를 받는다. 일레인에게 사랑에 빠진 그는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에게 얼씬도 하지 말라면서 그를 밀어낸다. 그녀가 대학을 다니고 있는 지역까지 찾아가서 그녀에게 매달리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벤자민을 찾아와서 의사와 결혼할 예정인 그녀를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벤자민과 일레인 부모님의 갈등은 그와 기성세대 사이의 갈등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벤자민을 칭찬할 때는 언제고 그에게 자신들의 딸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그들의 마음은 벤자민이 기성세대에 대해 갖는 반감을 더욱 극대화하였다.

결혼식장 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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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장면이 이 영화가 시초였구나.  /  출처: Britannica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저 장면에서 벤자민은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 우선 기성세대의 문법을 타파했다는 해방감이다. 얼룩지고 땀에 젖은 그의 행색은 새하얀 장로 교회와 대비가 된다. 그리고 그는 엄숙하고 차분한 가운데 진행되는 결혼식장에 나타나서 소란을 피운다. 마치 지구에 외계인이 출현한 듯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이 사회가 벤자민과 같은 젊은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같다. 이러한 압박을 물리치고 일레인의 손을 잡고 뛰어나가는 그의 모습은 많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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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버스에 올라탔을까? 차에 기름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  출처: Broken Panda

결혼식장을 나와 버스에 올라탄 그들은 해맑게 웃는다. 그런 그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가운데 벤자민과 일레인의 표정은 굳어가기 시작한다. 기존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그들은 해방감과 함께, 세상이 그들을 누르는 무게감을 동시에 느낀다. 당장 직면한 문제들 앞에서 그들은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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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어버린 저 표정들이 이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  출처: Broken Panda

이번 생은 처음이라와 엮어보기

‘이번 생은 처음이라’라는 드라마는 영화 ‘졸업’의 주제처럼 기성 드라마의 흔한 전개를 따르지 않았다. 16부작 인데 첫키스는 1화에, 결혼식은 5화에 해치워버리는 속도감은 사랑과 결혼으로 마무리되는 흔한 드라마의 결말을 따르지 않을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나는 1화에 첫키스를 하는 모습에 반해 이 드라마를 정주행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드라마 주인공 지호 (정소민) 또한 영화 주인공 벤저민과 닮았다. 정소민 특유의 동그랗게 뜬 눈에 멍한 표정은 영화 초반 벤자민이 자주 보여주었던 초점이 풀린 표정과 비슷하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두고 메인작가에게 치이는 고달픈 보조작가 역할을 맡으면서 모태솔로(…)이기까지 한 그녀는 기성세대가 주도하는 이 사회와의 갈등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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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공항에서, 드라마에서는 터미널에서 멍한 표정의 주인공들이다.  /  출처: Tving

드라마에서 나타난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도 영화 ‘졸업’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정소민이 이민기와 결혼한 이유는 서울에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계약 결혼을 통해 그들은 겉으로는 부부지만 실은 집주인과 세입자 관계일 뿐이다. 결혼 생활 중에 그녀는 시아버지에게 사실 그들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한 게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그 말을 들은 시아버지는 ‘그게 뭐 어때서?’라는 반응을 보이는데, 결혼이란 조건이 맞는 사람과 하는거지, 사랑한다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정소민은 당황하고,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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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Real Love를 꿈꿨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  출처: Tving

정소민의 고등학생 시절 일기장에는 자신의 장래 희망으로 ‘사랑’이 적혀있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정소민은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을 따르기 보다 자신만의 의미를 직접 만들어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이다. 그런 그녀에게 결혼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일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녀는 서울에서 살 집을 구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계약 결혼을 하였다. 항상 기성세대를 벗어나려는 열망을 가졌던 그녀는 결과적으로 보자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따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아버지의 말씀을 통해 그 사실을 인지한 그녀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꽤나 큰 충격과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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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민 - "사랑해서 하는 결혼은 행복한거겠죠?" 하고 눈물이 맺히는 장면이다.  /  출처: Tving

솔직히 젊은이는 잘 모른다

선생님: 공부도 안 하고 놀기만 하는 고1은 커서 뭐가 될까요?
학생: 고2가 됩니다.

아주 옛날 유머이긴 하지만 저 말에는 깊은 뜻이 있다. 적어도 졸업 전의 학생이라면 그들에게 내일이란 짜여진 각본이며, 결말이 정해진 소설과 같다. 하지만 졸업한 젊은이는 상황이 다르다.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야 할 지 오로지 그들 손에 달렸으며, 자유와 방황 그 기로에 서게 된다. 다만 젊은이들이 확실히 인지할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1. 어른들이 살아온대로 사는 건 아닌 것 같다.
  2. 어찌 되었건 지금 나에게 현실은 버겁다.

기성세대 가치관의 탈피와 젊은 세대가 짊어지는 인생의 무게감은 항상 존재해왔다. 1960년대 배경인 영화 ‘졸업’에서도 세계대전 이후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음에도 베트남 전쟁의 폭력성을 목도한 당대 젊은이들도 같은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2020년대를 살고 있는 지금,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열풍과 코로나로 촉발되어 뉴노멀이 되버린 세계화의 단절을 살아가는 시대에도 다를 건 없다. 젊은이들이 가지는 이러한 생각들은 특별한 사건이나 현상으로 촉발된 시대정신이 아닌 20대라면 당연히 느끼는 감정에 불과하다. 지금 젊은 세대가 기성 세대소리를 듣는 시대가 되어도 미래 젊은이들은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어른들이 볼 때 다소 ‘낭만적’이지 못한 생각을 하고 삶을 사는 젊은이들을 감히 대변해보겠다.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하는 어른들의 물음에 벤자민은 “잘 모르겠어요”를 연발한다.
그건 가장 솔직한 젊음의 고해성사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면 쉽게 고쳤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지금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쾌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본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따르지 말라고. 기성세대가 볼 때 젊은이들이 하는 선택과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주눅이 든 채 기성세대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솔직하게 모르고 있어도 된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