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에 앞서

존속 토막살인 사건

2000년 5월. 모두가 놀랐던 살인사건이 있었다. SKY에 다니는 한 대학생이 그의 부모님 두 분을 살해하고 토막을 낸 뒤 유기한 것이다. 요즘 일어난 사건이라 해도 믿을 수가 없는데, 20여년 전 이었으면 사회에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 패륜적인 살인사건의 범인인 대학생 이씨 (이하 이군)는 사실 어릴적 부터 지속적으로 학대를 당해왔다는 사연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정사를 다룬 책이 바로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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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이모씨. 이 사건은 그의 본명으로 알려졌다.  /  출처: 네이버 블로그

영화 폭스캐처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학교 교양 강의였다. 영화 ‘폭스캐처’ (2015)를 다루는 시간이었는데, 실존 인물이자 영화 주인공으로 존 듀폰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재벌가 가문 출신으로 막대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있지만 그의 어머니는 어릴 적 부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어머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존 듀폰은 열심히 몸부림치지만 그녀가 돌아가실 때 까지 인정받지 못 한다. 끝내 어머니로부터 사랑받지 못 한 듀폰의 내면 심리를 교수님께서는 이 영화의 주요 포인트로 짚으셨다. 그러면서 이 사건과 책을 언급하셨는데, 어린 시절 애착형성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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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폭스캐저의 존 듀폰. 포스터만큼 영화의 분위기가 그리 밝진 않다.  /  출처: 다음 영화

마음에 든 책 제목

수업 중 짧은 언급이었지만, 나는 그 책이 아주 인상깊었다. 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범행을 결심하기 까지의 배경이 궁금했다. 특히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라는 책 제목을 볼 때, 이군이 하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2000년대에 나온 책이라 못 구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학교 도서관 일반서고에 있었다. 찾아보니 아주 예전에 절판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을 구할 수 있다니 운이 좋았다.

본격적인 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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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절판되어버린 책.  /  출처: 교보문고

책으로 나올 수 있던 이유

이 책의 저자는 심리학자로, 이군과 그의 부모님의 심리를 분석한 책이다. 평범한 삶을 살았던 그들이, 심지어 부모님 두 분은 돌아가셨음에도 이 책을 만들 수 있던 이유는 이군의 일기 덕분이었다. 그는 어릴적부터 꼼꼼이 일기를 써왔으며, 메모나 쪽지들도 많이 남겨왔다. 이러한 글과 교도소에서의 면담들을 바탕으로 그의 과거와 심리상태에 대해 합리적으로 재구성을 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일기나 아버지가 남긴 쪽지 들도 인용되었다. 이러한 기록물들을 보니 지금 우리의 스마트폰에는 우리의 인생이 담긴 것 처럼 20년 전에도 그들의 일상을 글에 담았던 것 같다.

책이 시사하는 점

이 책의 저자는 이군이 범행을 저지른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부모님의 존재, 애착형성의 문제, 군 생활, 왕따 사건, 영화와 게임 등 다양한 요소들을 바탕으로 그의 동인을 설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이 사건이 엽기적인 살인으로 끝날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부모-자식 관계와 아동학대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유교적 전통이라는 미명 아래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었던 폭력이 한 사람의 성장과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애정의 부재

이 사건의 실마리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출발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부모-자식 관계에는 애정이 하나도 없었다. 우선 그의 어머니는 개인주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명문 여대를 졸업하여 출세를 위해 장교였던 남편과 결혼한다. 하지만 뜻대로 일이 풀리질 않자 그 기대를 자식들에게 돌려 엄하고 모질게 키웠다. 보통 부모님들이 자식을 다그치는 것은 다 자녀들이 잘 되라고 하는 일인데, 이군의 어머니는 그보다 본인의 욕구 충족의 이유가 더 컸다. 이군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자주 성질을 부렸으며, 그럴 때마다 그는 더 움츠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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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표리부동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  출처: 유튜브

그의 아버지는 가정에 무관심했다. 중령으로 예편한 군인 출신으로서, 가족과 떨어져서 지냈고 집에서는 군대와 같이 권위주의적으로 자식들을 대했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밖에서 월급만 벌어오면 될 뿐, 가사일이나 자녀 양육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내와 자식과의 관계 또한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아버지가 이러하니 이군 입장에서는 어머니의 다그침에 더 심하게 시달렸다. 또한 자신의 상처에 무관심한 아버지 또한 그 거리감이 더 멀게 느껴졌을 것이다.

소통의 부재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온 이군은 어릴 적 부터 순종적으로 살아왔다. 스파르타 식으로 다그치는 어머니의 성화에 아무 말 없이 따르기만 한 이군은 학교나 사회에서도 군말 없이 조용한 성격으로 살아갔다. 게다가 그는 IQ가 138일 정도로 머리도 좋아 SKY 명문대에 입학하였다. 마음 속에서만 분노를 삭여서 그런지 그의 주변인들은 그가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했다. 하지만 그의 일기에는 그의 부모님과 친구들도 알아채지 못 한 낮은 자존감 덩어리가 고여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은 채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척 살아왔다.

이러한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반항을 했다. 자신의 형의 이사를 도와주고 집으로 온 날, 형의 안부를 묻는 어머니에게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터졌다. 마침 얼마 전 자신의 일기에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불만인 점들을 정리했던 그는 지난 날들을 읊어내었다. 그 말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그런 일이 있었냐면서, 그 때 말하지라는 식으로 반응했다. 이군은 이러한 어머니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 했다. 자신이 용기내어 말을 꺼내었다면 어머니는 사과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적반하장인 양 대답이 돌아온 것이었다. 네 시간이 넘게 이어진 언쟁은 이군과 어머니의 마지막 소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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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알쓸범잡2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다루었다. 그의 사연을 들으면 그렇게 악랄하진 않았다.  /  출처: 유튜브

남겨진 깊은 여운

그들의 특별한 관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특별하다. 이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특별한 정도가 어디까지냐면,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세상 그 누구가 타인에게 사랑을, 그것도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을 베풀겠는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그래야 한다. 부모의 역할은 자식을 태어나게 하는 것만이 아니다. 먹이고 입히는 일과 함께 사랑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바르지 못한 특별함

이군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부모답지 못 했다. 자식을 소유물 수준으로 여길 뿐, 하나의 인격으로 대한 것 같아 보이질 않는다. 그들도 부모와 자식 관계가 특별하기 때문에 그리 대해도 된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별한 만큼 자식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을 주진 않았다. 시키는 말 잘 따라서 SKY라는 명문대에 입학하기 까지 한 이군은 평범한 사람이 되지는 못 했다. 그들의 부모님이 그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결론: 사랑이 없으면 학대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사랑이 없는 건 학대를 의미한다.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히면서 키웠다고 한들 그 안에 애정이 없었다면 학대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직 나는 자식의 입장만 되어 보았지, 부모의 입장은 경험하지 못 했다. 이군의 성장 배경을 들여다보니 부모라는 존재가 실로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내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이 세상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위해 실천하고 있음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나는 부모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감히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