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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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주워온 책들을 읽다보니 쿠미코는 방구석 지성인이 되었다. / 출처 : 다음 영화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3)에는 여자 주인공 쿠미코는 자기 자신을 ‘조제’라고 부른다. 조제라는 이름은 소설책 주인공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그 소설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영화를 보는 데는 지장이 없없다. 시간이 지난 후에 저 조제라는 이름의 출처가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달 후, 일년 후’라는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프랑수아즈 사강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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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손 끝의 담배에서 느껴지는 사강의 아우라. / 출처 : Getty Images

작가의 이름을 어디서 많이 들어봤나 했는데, 바로 저 명언을 남긴 사람이었다. 먀약 소지 혐의로 기소된 상황에서 남긴 말이라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멋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리스트를 보던 중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눈에 띄었다. 그걸 보고 요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2022, ENA)로 핫한 박은빈 주연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2022, SBS)의 제목이 여기서 따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번 보려다가 노잼일 것 같아서 안 보았는데 소설이라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소설과 드라마는 제목만 같을 뿐,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가 아니라 …

사강은 이 책의 제목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책 중에서 남자 주인공 시몽이 여자 주인공 폴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편지에서 저 문구가 나온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폴은 편지를 보고 ‘내가 브람스를 좋아했나…’하고 속으로 고민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브람스를 한번도 좋아해보지도, 싫어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폴은 시몽을 만나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시몽을 알게 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직 그에 대한 호불호나 관계의 수위를 결정하지 못 했다. 결국 저 말줄임표(…)에 있는 의미는 브람스나 시몽이나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환기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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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저 말줄임표가 핵심이다. / 출처 : 교보문고

이건 책 뒤에 있는 작품 해설에 나오는 TMI인데, 프랑스 사람들은 브람스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한다. 모짜르트 연주회였다면 그냥 초대해도 되는데, 호불호가 갈리는 브람스라면 상대방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시몽과 폴의 나이 차는 14살 연상의 슈만의 아내를 연모했던 브람스의 짝사랑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내용은 별거 없다

이 소설의 내용이 뭐냐고 물어보면 별거 없다. 여자 주인공 폴, 그녀의 권태로운 남자친구 로제 (블핑이랑 헛갈리지 말자. 남자이다), 그리고 15살 연하 시몽, 이 세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은 주로 로제와 시몽 사이에서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 있는 폴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아쉽게도 내용 전개에 있어서 반전이나 우여곡절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솔직하게 흔들리는 폴을 보자면 사랑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사랑은 난해하고 모호한 감정이다

사랑은 관계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다. 권태기에 접어든 폴과 로제의 관계는 연인이지만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로제는 다른 젊은 여자에게 한눈팔고 있으며, 폴은 그런 로제의 행실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폴의 입장에서는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시몽이 더 애인같았을 것이다. 비즈니스 적으로 만난 관계라 하더라도 그들 사이의 썸은 폴과 시몽과의 연애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이후에 폴이 로제를 생각하며 시몽을 밀어낼 때도 거절보다는 썸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감정은 뜨거웠다.

사랑은 관계 만으로 단정 지을 수 없기에 사랑의 본질은 모호함이다. 폴은 그동안 사귀던 로제를 잊지 못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롭게 나타난 시몽의 존재감도 무시하지 못 한다. 그녀의 사랑은 익숙함과 신선함 사이에서 어느 편을 택해야 할 지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폴은 모든 행동과 레파토리가 쉽게 떠올려지는 로제와, 어떤 말과 행동을 할 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 시몽을 견주어보기도 한다. 그녀는 확실함과 불확실함 사이에서 어떤 사랑을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이란 썸, 연인, 부부 등과 같이 명확한 관계가 아니라 모호한 감정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한달 후, 일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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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가 좋아했던 그 책. / 출처 : 인터파크도서

복잡한데 별거 없는 내용

이 소설은 서로 얽힌 등장인물이 9명이나 되어서 조금은 복잡하다. 조제와 자크는 연인이고, 베르나르와 니콜은 부부이다. 그런데 베르나르가 조제를 좋아한다. 그리고 또 다른 부부 알랭과 파니, 알랭의 조카 에두아르가 나온다. 여기서 알랭과 에두아르는 베아트리스라는 여배우를 좋아하는데, 그녀는 졸리오라는 사람 곁에 있고 싶어한다. 마치 한국의 주말연속극에 나오는 관계도와 비슷하다.

내용은 별거 없다. 서로 만나서 구애하고, 흔들리다 다시 자신의 원래 짝으로 돌아가게 된다.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같은 전개에 결말이라 다를 건 없었다. 두 권의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전달하려는 주제가 매우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찾아보니 프랑수아즈 사강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고 역시 나의 감상은 정확했다.

작가는 같은 작품을 쓰고 또 쓰는 것 같다. 다만 시선의 각도, 방법, 조명만이 다를 뿐.

조제가 조제에게 반한 이유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여주인공 조제는 그 이름을 소설 ‘한달 후, 일년 후’ 의 여주인공에게서 빌려왔다. 그녀가 어떻게 조제에게 반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우선 소설 속 조제는 부유하다. 생활이나 생업에 얽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녀는 운전을 잘한다. 생전 속도감 있는 드라이빙을 즐겼던 프랑수아즈 사강 본인이 투영되었는 지 모르겠지만, 조제는 아주 빠른 속도에도 능숙하게 운전을 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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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후 일년 후 속편을 읽는 중인 조제. / 출처 : 다음 영화

사랑에 관해서도 조제는 우상이 될 법 하다. 그녀는 이미 어린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열정적인 감정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이성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차오르는 감정을 바탕으로 충실하게 사랑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별에 대해서도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아무리 뜨겁게 달아오르는 사랑을 했을 지라도 유한하며 그 끝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덧없는 사랑

프랑수아즈 사강의 저 두 작품 모두 사랑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다. ‘덧없음’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지나가는 시간이 매우 빠르다.
「2」 보람이나 쓸모가 없어 헛되고 허전하다.

평소에는 1번의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덧없는 세월) 하지만 작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덧없음이란 2번을 의미한다. 사랑은 말이나 행동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될 수 없다. 대신에 머리 속 깊은 생각과 마음 속 진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 본질이다. 이러한 사랑의 끝을 맞이할 때 돌아보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마치 그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느낌은 그 시간을 공허하게 만든다.

짧은 결론

프랑수아즈 사강의 사랑 이야기는 일반적인 연애 프로세스를 따라가지 않는다. 두 사람이 만나는 어떠한 계기, 고백하는 장면, 사귀다 싸우고 헤어지는 모습과 같이 진부한 연인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대신 그녀는 주인공의 심리에 집중한다. 말과 행동 보다는 홀로 상대방을 떠올렸을 때의 생각과 감정들이 이를 대신한다. 집요할 정도로 묘사된 주인공들의 내면은 프랑수아즈 사강이 생각하는 사랑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