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는 다른 현대사회

나의 고등학교 한국사 선생님께서는 역사란 자유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 이라고 스스로 정의하셨다. 고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흔적들은 선사시대 유적으로 남았고, 사회가 정한 한계를 뛰어넘는 순간들은 모두 역사적인 사건들로 기록되었다. 인류라는 거대한 강줄기는 자유를 향해 흘러왔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도 이전보다 더 자유로워 젔다는 것에 대해 나는 동의한다. 우리나라 헌법 제2장에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어찌보면 당연하게 여겨지는 자유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장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또한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우주로 보내버릴 수도 있거니와 더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석기시대나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살라고 한다면 아마 답답해서 못 살 것이다.

이렇게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양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는 점점 더 커져갔다. 학교에서는 모르는 외국인과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라는 회화를 가르쳤고, 미국이나 유럽같이 다인종으로 구성된 국가를 배우면서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갈 모습이라고 배운다. 토의를 할 때는 경청하는 자세로 남의 말을 들으며, 결론은 되도록이면 모두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내길 원한다. 다른 사람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며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되도록이면 수용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피로사회라는 책은 현대 사회를 긍정성 과잉 시대라고 부른다. 부정하고 거부하길 꺼려하고, 서로 다른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나와 다르면 무조건 배척해버리는 과거와 달리 패러다임적으로 인류가 급격히 변화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정성이 제거되었으니 오히려 더 잘 된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사회는 새로운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면역성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같은 것이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면

세상은 공부하기가 점점 더 쉬워지고 있다. 옥스포드나 MIT와 같은 대학들의 강의는 한국에서 MOOC을 통해 쉽게 들을 수 있으며 내가 모르는 지식들은 구글에 검색하면 다 나온다. 요즘에는 학문적인 수준의 강의 뿐만 아니라 실무적인 강의들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비전공 개발자 4주 완성과 같은 과장이 조금 섞인 홍보글을 볼 때면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최소 4년이라는 긴 시간과 매년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CSE 분야 전공생 입장에서는 누구나 개발자가 될 수 있다고 외치는 세상에서 움츠려들게 될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유신정권도 아니고 딱히 사회는 나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은 거의 없다. 한계는 존재하지 않고 가능성은 무한한 만큼 우리는 더욱더 열심히 살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변한 지금의 모습에서 발견하고 있다. 이렇게 변한 이유로는 개개인을 제약으로 통제하는 것 보다 성과를 통해 스스로 채찍질 하는 방법이 더 생산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과에 대한 압박은 시스템적 폭력이라는 새로운 모습의 폭력일 뿐이다.

죽은 듯이 살기 어려운 세상

모든 것이 허용되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의 경쟁상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어제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은 끊임없이 스스로 발전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진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용납이 안 되며, 기대 이하로 행동하고 결과를 내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자폐적 성과기계라고 부른다. 고민과 부정이라는 것은 이 사회에 적폐로 간주되며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끊임없이 활동해야 하는 처지가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과연 활동적인 삶이 좋은 모습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들이 멀티태스킹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문명이 발달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행동이 아닌, 야생동물들도 할 수 있는 수준의 행위라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에 반해 부정성무위야말로 훨씬 더 고차원적인 수준의 행위이며, 현대 사회에서 부당하게 폄하되고 있다고 말한다.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온갖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켜내고 있는 행위이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야 말로 가장 창의성이 빛나는 순간이라고 치켜세운다. 규율사회에서 억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 부정성이 아닌, 성과사회에서 우리를 탈진시키려는 위협으로부터 지켜내는 수단으로서의 부정성이야말로 지금 사회에서 강조되어야 할 덕목이라고 말한다.

지금 내가 우울하다는 것은

Yes we can이라는 말은 곧 Why can’t I라는 말과 같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지금이 세상이 가장 이상적인 것 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를 수용하고 있으며, 우리 또한 모든 것을 긍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과거와는 달리 우리는 이제 부정하고, 투쟁하고,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외부의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사회가 제시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 개인들은 소리 없이 울고있을 뿐이다. 우을증, 번아웃, 경계성성격장애는 이 사회에 지배 없는 착취가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모든 것을 긍정하는 사회는 더 나은 사회인걸까? 피로사회라는 책을 읽고 나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은 기계가 하는 작업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착취해야 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사회에서 이 굴레를 벗어날 다른 방법들은 보이지 않는다. 피로사회라는 것은 성과와 효율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와 강하게 결합되어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출 수 있는 힘을 가진 부정성을 사회적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본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