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 글을 쓰는지

처음부터 이 책을 리뷰할 생각은 없었다. 시작은 친구의 추천으로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소설을 읽은 후 였다. 한창 겨울 계절학기를 듣고 있을 때라 바빠서 서둘러 리뷰 작성을 해치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며칠을 고민했는데도 글은 잘 써지질 않았다. 자료조사만 이어가던 중 정세랑 작가의 인터뷰가 실린 민음사 릿터 16호에서 최은영 작가의 인터뷰를 발견했다. 우연하게도 그 글 속에서 왜 내가 ‘시선으로부터,’ 리뷰가 써지지 않는 이유를 발견했다. 그 글에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소설의 몇 안되는 인용구가 있었는데, 지금 내 심정을 제대로 저격하는 기분이 들었고 이로부터 심오함을 느꼈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 대한 리뷰를 접어둔 채 나는 최은영 작가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이누도 잇신 감독의 어떤 영화들처럼 거의 모든 영역에서 ‘진실하다’라는 느낌을 준다.” 알라딘에서 저자에 대한 서평을 읽던 중에 나는 이 문장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을 보고난 후 느낀 그 감정이 내 마음 속에 다시 떠올랐다. ‘과연 어떤 작가이길래…’라는 호기심이 나를 자극시켰고 아직 계절학기가 종강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최은영 작가의 두 권의 소설집과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실린 소설집 한 권을 읽기 시작했다.

계절학기 기말고사를 넘어 방콕 여행을 하고 있을 때에 나는 세 권의 책을 다 읽었다. 2022년 나의 동남아 여행을 함께했던 ‘슬픔이여 안녕’을 대신해 ‘내게 무해한 사람’을 가져간건 지금 생각해볼 때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귀국 후 설 연휴까지 보내고 나서 읽었던 세 권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을 고민하다 ‘내게 무해한 사람’을 고르게 되었다. 다른 두 권의 책을 제친 이유는 별거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이 저자를 알게 된 소설(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이나 그 저자의 데뷔작(쇼코의 미소)보다 더 인상깊었다는 사실에는 어떤 이유가 있음이 분명했다. 이제 그 이유를 글로 풀어보려 한다.

소설집을 리뷰하는 기술

생각나는 대로, 느낀 그대로 써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이 중단편집을 읽고난 후 나의 결론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중에 이들을 하나로 모으는 리뷰의 마지막 줄을 짜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나의 글을 읽었다면 하나의 결론이 나왔겠지만, 여러 글을 읽은 만큼 그 결론이 하나 뿐일 리가 없었다. 각 소설마다 인상깊은 부분을 하나씩 뽑아내었고 그에 대한 리뷰를 써내려갔다. 느낀점이 적거나 중복되는 부분을 추려내니 자연스럽게 하나의 리뷰 글 분량이 나왔고, 신기하게도 그 와중에 하나의 결론도 튀어나왔다. 다른 소설집도 이렇게 리뷰하면 되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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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  출처: 교보문고

헤어짐의 이야기

최은영 작가의 작품들은 헤어짐에 관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헤어짐은 연인 사이 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로 말하진 않았지만 썸 이상을 타는 사이나, 친구, 가족 그리고 이웃집 등 멀어지는 관계는 다양하다. 그 헤어짐의 과정에는 극적인 위기나 반전 같은 건 없다. 평범해 보이는 관계 속의 미세한 균열, 조금은 틈이 보였지만 다시는 결합되지 못 하리라고 예상치 못 한 흠집이 전부다. 차라리 연인이었다면 대판 싸우고 서로 고개를 홱 돌려버리니 그 끝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상대와 언제부터 멀어졌는지 모호하게 짐작만 할 뿐이다.

배려라니. 지금의 이경은 생각한다. 배려라니. 그 거짓말은 수이를 위한 것도,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이고 위선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이경은 몰랐다.

(그 여름, 내게 무해한 사람, p. 52)

이러한 헤어지는 이야기들은 과거 회상 형식을 통해 전달된다. ‘내게 무해한 사람’의 첫 번째 소설인 ‘그 여름’은 이경이 전 연인이었던 수이와의 연애를 돌아보는 내용이다. 고등학생 때 서로 만나 실컷 사랑을 나누었지만 졸업 이후 그들은 행동과 마음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대학생이 된 이경 입장에서는 축구선수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카센터 일을 시작한 수이의 선택과 진심을 이해하지 못 한다. 애정 결핍까지 느낀 이경은 주워담지 못 할 말들까지도 수이에게 하게 된다. 답답했던 감정 속에서 진심을 토로하는 일은 그 당시 이경에게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상대방인 수이 그리고 모든 일이 지난 후 회상하는 본인 스스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말로 남았다. 과거의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마음과 그 순간을 돌아보는 마음이 동시에 이야기 속에 녹아있다.

자신이 다가가면 주희가 거북해할 것 같았고, 무슨 말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희는 용기를 낼 수가 없어 발길을 돌려 집으로 왔다. 그 일을 두고 내내 가책할 것을 알지 못한 채로.

(지나가는 밤, 내게 무해한 사람, p. 102)

‘내게 무해한 사람’에 수록된 7편의 소설 모두 10대와 20대 때의 서툰 감정이 녹아있다. 그 중 ‘지나가는 밤’은 자매의 이야기로, 윤희가 한국에 들어오며 연락이 끊겼던 주희와 재회하는 내용이다. 어릴 적 홀어머니 밑에서 부족하게 자란 탓에 혼자서 버티려는 윤희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려는 주희는 못마땅 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의지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과 분가 이후 그들의 관계는 자연스레 멀어져갔다. 다시 만난 순간에서도 여전히 윤희는 동생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지 못 한다. 어릴 적 티격태격 싸우긴 했어도 돌이켜보면 참으로 애틋한 10대였다. 살아온 시간이 짧았던 만큼 밀도 있게 소중한 존재였지만 현재는 과거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독백 차원의 고백만 있을 뿐 감정이 어긋난 채 끝내 서로는 화해하지 못 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모래로 지은 집, 내게 무해한 사람, p. 127)

이 책에서 마음에 울림을 주었던 말 중 가장 경쾌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네가 뭘 알아’라는 건 타인에게 이해 받지 못하면서 동시에 타인을 이해하지 못 할 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방법이긴 하다. 근데 남들에게 날카로운 가시를 돋치는 방식으로 말이다. 자신은 특별하다는 마음가짐 그 이면에 드리워진 타인 또한 보통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 쉽게 간과된다. 구겨진 마음은 안타깝게도 다른 마음을 구기는 데 쓰여버린다.

그날 모래의 말과 눈물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닫게 됐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모래로 지은 집, 내게 무해한 사람, p. 180)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소설 ‘모래로 지은 집’에서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주인공과 모래, 공무 세 사람의 우정을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 주인공은 모래에게 비뚤어진 감정을 지녔다. 모래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서 배부른 소리만 하는 그런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모래의 말과 행동 그리고 고통까지도 모두 주인공 입장에서는 못마땅했다. 모두가 마지막일줄 몰랐던 세 명이 모인 날 모래는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다. 시간을 돌린다면 이들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마음을 감추거나, 돌리거나 아니면 대놓고 드러낸다. 마음을 드러낼 모래의 용기를 주인공은 못 느꼈는지, 느꼈지만 주인공은 그 헐벗은 마음을 쓰다듬을 용기를 못 냈는지, 그 날의 진실은 그들 조차 모를 일이다.

상처에 남은 그 고통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다. 상처의 고통을 안다면 더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 받은 마음은 고통을 헤아리는 일이 어렵기만 하다. 그러기 때문에 상처 받은 마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를 주는 마음이 되버린다. 이 세상에서 상처주는 일이 사라져서 모두가 고통받지 않으면 좋을텐데 말이다.

위로와 자책의 서늘함

스물하나의 나는 그 끌림의 이유를 말지 못했고, 미주는 내가 자신을 동정하고 있다고 했다. 나의 연민이 끔찍해서 더이상은 연인으로 만날 수 없다고 말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어떤 납득에는 십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고백, 내게 무해한 사람, p. 208)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순간에도 상처를 주는 경우는 많다. 심지어 따뜻한 마음을 전한 순간도 말이다. 소설 ‘고백’은 이중구조이다. 고등학생 시절 진희가 미주에게 동성애자임을 고백했고, 성인이 된 후 미주가 남자친구에게 그 당시 자신이 미주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진희는 커밍아웃 이후 하늘로 떠났고, 남자친구는 미주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이별을 통보받았다. 진희의 고백에 미주의 반응은 침묵과 당황, 그리고 회피였다. 어찌할 줄 몰랐던 그 모습이 진희에게는 상처였음을 미주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남자친구의 반응은 연민이었다. 자신의 동정 어린 시선이 마찬가지로 미주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한참 뒤에 깨닫는다.

함부로 위로를 건네는 그 손길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배려와 동정으로 포장된 그 날카로운 칼날은 주는 사람 입장에선 그저 따뜻한 마음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진희를 바라보며 굳게 닫혔던 무거운 그 입은, 미주를 바라볼 때 순수한 안타까움에서 나온 그 눈빛은 가슴 아픈 상처를 만들고 말았다. 소설에서는 중첩된 두 관계 모두 헤어짐으로 그 끝이 드러났지만, 우리가 은연 중에 만든 상처들로 얼마나 많은 관계가 끝났을지 모른다.

지금 이렇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자책하는 마음도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2007)’에서 전도연의 아들이 납치되어 살해된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고자 전도연은 교회를 다니게 되고 죄인을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르기로 한다. 그렇게 교도소에 찾아가 범인과 면담하는데 범인도 교회를 다니고 나서 스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한다. 평온해 보이는 표정의 범인과 분노가 극에 달한 전도연의 대비가 아직도 생생하다. 전도연의 표정에 드러난 끔찍함이 소설 속 주인공인 미주가 남자친구로부터 느꼈던 그 끔찍함과 많이 닮아있었다.

오랜 질문들

나에겐 해묵은 질문들이 있다. 아마 이 리뷰부터 이어져온 것 같다.

  •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 왜 우리는 너무 쉽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걸까?
  • 그렇다면 서로 이해하고 연대하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들의 기원을 짐작해보자면 나의 내면에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남아있는 것 같다. 이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은 것 같다. 이런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작가 최은영이었다.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몸으로 느꼈으니까.

그러나 그랬을까, 내가.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오래도록 나는 그 사실을 곱씹었다. 의도의 유무를 떠나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나, 때때로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무심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 나.

(작가의 말, 내게 무해한 사람, p. 324)

그래서 깨달은 바는

나는 최은영 작가의 책을 통해 저 질문들의 답과 해결방법을 찾고 싶었다. 세 권의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런건 없음을 깨달았다. 이 인터뷰에서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드러난다.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할 때, 관계가 아닐 때 무해한 사람이 되기 더 쉬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이 말은 곧 사람이 관계를 맺으면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상대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거나 단정지으면서 상대를 다 이해했다고 예단한다. 주인공 눈에 상대방이 달라진 점은 없었다. 단지 그걸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주인공의 마음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함부로 이해를 하려 할 수록 마음은 어긋날 뿐이고, 그 사이에서 덧난 상처 또한 커져만 간다. 주인공들은 끝내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 한다. 시간, 공간, 죽음과 같은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마음과 마음 사이에 생겨버렸다. 소설이 끝날 때 까지도 서로 연대하는 방법은 찾지 못했다.

이 고독한 사실을 체념한 후에야 소설과 나 자신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소설 ‘쇼코의 미소’ 속 할아버지-쇼코, ‘한지와 영주’의 두 주인공, 그리고 ‘아치디에서’의 하민-랄도. 왜 그들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말로 대화할 수 밖에 없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었는지. 내가 싱가포르에서 대화 내용을 하나도 못 알아먹는 곳에 들어갔을 때 아늑함을 느꼈는지. 그리고 동남아 여행을 하면서 한번 보고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을 왜 더 편한 마음으로 대했는지.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