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랑 주제의 영화 과제 특집

  1. 사랑에 대한 순수한 욕망 - 콜미바이유어네임
  2. 계급을 넘어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 가장 따뜻한 색, 블루
  3. 함부로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춘기의 사랑 - 소녀의 세계

사춘기

사춘기는 여러모로 인생에서 독특한 시기이다. 신체적으로 보면 2차성 징이 일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성에 대해 눈이 뜨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맘때 청소년들은 자아정체성을 형성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사춘기의 대부분을 중고등학교에서 또래 친구들과 함께 보내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겪는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하고는 분명히 다른 특성을 가진다. 그리고 영화 ‘소녀의 세계’는 소녀의 감성으로 이 사랑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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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세계 포스터. 미흡한 점들이 많았지만 독립영화라 그려러니하고 봤다. / 출처 : 다음영화

영화소개

영화 ‘소녀의 세계’는 대한민국 독립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여고생 3명으로, 철없는 고 1 소녀인 선화와 같은 학교 인기 많은 선배 하남, 그리고 어딘가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는 선배 수연이 있다. 학교 연극부 연출 담당이었던 수연의 눈에 우연히 들어온 선화는 줄리엣 역할에 캐스팅이 되었다. 로미오 역할을 맡은 사람은 바로 하남으로, 전교생의 이상형 같은 존재이다. 처음에 선화는 친구들이 여자 선배인 하남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선화도 하남에 대한 감정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한다. 하남과 함께 연극도 연습하고 스쿠터도 타고 바닷가도 가고 둘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선화는 하남이 연극부 다른 선배 수연과 교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둘의 마음은 멀어져갔다. 그리고 연극날 당일, 무대 위에서 줄리엣 옷을 입고 있으며 가면을 벗은 채 등장한 사람은 선화가 아닌 수연이었다. 그렇게 첫 사랑이 끝난 선화는 낙담은 잠시 다시 활기찬 일상으로 돌아갔다. 선화를 비롯해 그녀를 둘러싼 소녀들에게서 나타나는 여러 사랑들은 바로 저 시기에서만 할 수 있는 사랑들이 나타난다.

관계가 없는 사랑

우선 이 영화에 나오는 소년, 소녀들의 모습에는 관계가 부재한 사랑이 등장한다. 주인공 선화의 단짝 지은은 선배 하남을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열렬히 좋아하고 있다. 선배를 만나고 싶은 마음 하나만으로 연극부에 선발되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기도 하고, 선배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고 지켜보며 설레고 있다. 아직 하남과 한 마디도 말을 나눠보지 않았지만 지은은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다 보여’라고 말하면서 마음속의 우상으로 삼고 있다. 그녀에게 나타나는 사랑은 간접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이다. 자신의 감정에서 나오는 선배를 향한 행동들은 거의 도달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이어 나간다. 또한 하남은 지은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니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은 혼자서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심취하고 있다. 영화 속 또 다른 등장인물인 우철은 선화를 졸졸 따라다니는 남학생이다. 매일 아침 선화네 집에 찾아와 선화네 부모님께 아버님, 어머님 호칭을 붙여 인사하고 고데기로 머리를 하겠다는 핑계로 선화를 만난다. 학교가 끝나고 선화를 만나고자 여고 주변을 서성이다 경비아저씨에게 걸려 벌을 서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철은 선화를 좋아한다. 그에게 나타나는 사랑은 마찬가지로 일방적이다. 선화의 마음에 매번 마음의 문을 두드리지만 매번 돌아오는 답은 없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한다. 우철의 사랑은 지은의 사랑과 달리 상대와의 상호작용이 존재하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사랑이 아닌 그저 친구의 입장에서 오고 가는 말 뿐이다. 이들에게 이별이란 어쩌면 없을 지도 모른다.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한 일이 없으니 상처받을 이유도 없고 한 순간에 사랑이 사라진다고 해도 남은 일상은 여전할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눈먼 사랑에 불과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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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의 졸졸 따라다니는 조병규. 저것은 썸도 아니다. / 출처 : 다음영화

궁금한게 많은 사랑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의 절반은 호기심으로 채워져 있다. 대부분 사춘기 청소년들은 자신조차 완전하게 파악한 적이 없다. 그러한 그들에게 타인이라는 존재는 더욱 더 미지의 인물일 것이다. 어느 날 사진 동아리에 속한 선화는 친구와 함께 사진들을 보다 문득 남자의 손과 여자의 손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말을 들은 선화의 친구는 당연하다고 말하며 대수롭게 넘겼지만 선화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선화는 어머니와 함께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어드리고 있었을 때 여자 어른의 몸과 여자 아이의 몸 또한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2차성 징이 발현되기 전의 아이들은 신체적 특징이 구분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살아온 삶이 짧기 때문에 서로 다를 것이 적었다. 그러나 사춘기를 맞이하며 예전에는 평범했던 것들이 새롭게 느껴지게 되는 시기에는 점차 남이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새롭게 인지한 사실이 늘어나거나 기존에 있던 생각이 변할 때도 그 상대방은 어떤 축에 포함될 지가 더 궁금할 것이다. 선화와 하남의 관계 속에서도 호기심이 가득한 사랑이 나타난다. 선화가 미묘한 감정이 생긴 이후로 하남을 계속 떠올리면서 그녀에 대해 ‘겉은 웃으면서도 속은 쓸쓸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여고생들이 선화 자신처럼 천진난만 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고 자신의 내면과 다른 사람은 그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사춘기 때는 아직 자기 자신도 완전히 바라보고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만큼 자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란 변화무쌍한 존재로 자기 자신 다음으로 궁금한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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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 역할을 열심히 준비 중인 노정의. 발연기를 연기하는 것도 대단하다. / 출처 : 다음영화

알 수 없는 마음

그리고 사춘기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선화는 하남에 대한 감정이 커져버린 이후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고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알았건만 자연의 섭리를 배신하는 듯한 이 내적 긴장감은 선화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 선화는 지금 자신의 심경에 대해 ‘괴물로 변하고 있어. 속에서 외계인이 튀어나올 것 같아’ 라고 말하고 있다. 상대방과 함께 있을 때 느껴지는 심경의 변화나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떠오르는 것은 설명하는 방법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안 떠오르니 선화는 그러한 표현을 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사람의 내면에 있는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도 깨닫기가 어려운데 동성에게서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이란 더욱 더 표현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선화는 열이 난다는 이유로 양호실에 가게 되는데 진찰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선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명력을 갉아먹는 듯 한 사랑에 대한 고민을 품었던 것이고 지금 자신의 상태를 열이 나고 아프다는 표현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전에 경험한 것 보다 새롭게 경험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시기이니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스스로 깨닫기가 어려울 것이다.

결국 끝나버릴 사춘기

가장 중요한 사춘기 사랑의 특징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사춘기가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듯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춘기는 자연스럽게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이 시기의 사랑도 그렇다. 식을 기세를 모를 정도로 뜨겁게 끓어올랐던 사춘기 사랑의 유효기간은 영원하지 않다. 선화는 항상 두근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안고 해남을 만났다. 그러나 해남이 이전에 수연과 교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급격하게 감정이 식어갔다. 대부분 첫사랑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만큼, 상대에게 전 연인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별을 택하진 않는다. 하지만 풍선처럼 부푼 마음을 갖고 있는 선화는 작은 흠집 한 번으로도 무너지기에 충분히 약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성장하는 시기인 만큼 다음번의 선화의 사랑은 이전보다 더 성숙해졌을 것이다. 이렇게 성장하다 보면 어느새 사춘기의 사랑은 끝이 나고 진정한 사랑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함부로 영원을 말하는 사랑

영화에서 연극 당일 날 무대에 선 줄리엣은 선화가 아닌 수연임이 밝혀졌을 때 객석에 가만히 앉아있던 선화는 조용히 극장을 나서면서 ‘내 첫사랑은 로미오였어’ 라고 낙담한다. 지금까지의 사랑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선화 입장에서는 사랑에 대한 공허감이 엄청났을 것이다. 보통 이별하는 아픔의 크기만큼 이별 후유증도 길었겠지만 선화는 달랐다. 밥맛을 잃지 않았고 다시 친구들과 예전처럼 웃고 떠들면서 지냈다. 철이 없던 시절에는 함부로 영원을 말한다. 상대적으로 짧게 살아온 인생에서 어떤 일들은 길다 못해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그렇지가 않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유한한 사랑이 되었을 때 사춘기의 사랑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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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과 하남의 과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 출처 : 다음영화

결론: 사랑은 사랑이었다

세 편의 퀴어 영화가 다루었던 사랑은 내 선입견과는 달리 성소수자들 만의 사랑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사랑을 다루고 있었다.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원초적으로 드러났던 ‘콜미바이유어네임’에서는 순수한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급 간의 사랑의 어려움이 잘 나타났던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는 사랑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 배경의 차이가 중요했다. 마지막으로 ‘소녀의 세계’ 감독은 ‘영화에서 묘사되는 사랑은 당연히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동성애를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제작하였다. 퀴어 영화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은 전부 퀴어라는 소재에 집중하고 있었을 뿐, 정작 영화의 본질은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 영화에서는 퀴어라는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닌 사랑하는 상대의 성별은 중요하지 않으며 그들은 어떤 욕망을 품고 있는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지,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 지에 대한 대답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참고자료

  • 유진도, “‘소녀의 세계’, 소녀들의 숭고한 사랑 담은 판타지 로맨스[유진도 칼럼]”, 미디어파인, 2018.11.15 링크
  • 이화정, “[히든픽처스] <소녀의 세계> 안정민 감독- 독립영화 사람스러움의 발견”, 씨네21, 2019.01.25, 링크